핀란드는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을 가장 철저히 이행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헬싱키시는 아동을 단순히 ‘정책 수혜자’가 아닌, ‘정책 결정과정의 공동 주체’로 보고 있으며, 이 철학을 기술과 결합하여 ‘디지털 아동권리 플랫폼’을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 시작은 매우 단순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곧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졌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도시에서 생활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불편과 아이디어는 정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었다. 이를 위해 헬싱키시는 회의나 위원회에만 의존하는 기존 참여 모델을 넘어서, 디지털 기술 기반의 상시 참여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 플랫폼은 단지 아이들의 의견을 모으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제안한 내용이 실제 행정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반영되는지를 모두 추적 가능하게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즉, 디지털 기반의 ‘아동 중심 의사결정 체계’인 셈이다. 이 플랫폼은 9살 이상 헬싱키 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제안은 단문 형식이거나 음성 녹음, 사진, 그림 첨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입력 가능해 어린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누구나 열람 가능하며, 제안에 대한 담당자의 공식 답변도 시민 누구나 볼 수 있다. 매월 시의회와 교육위원회는 해당 플랫폼에서 상위 제안 10건을 회의 안건으로 상정하며, 실제 조례 변경이나 예산 반영까지 이뤄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시스템이 ‘청소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헬싱키시의 모든 정책 시스템과 디지털로 연동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아동의 제안은 그 자체로 행정 시스템 안에서 실시간으로 ‘처리될 수 있는 정보’로 인정받는 구조다. 이 플랫폼이 단순한 이벤트나 상징적 창구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놀이터 낙후 시설 개보수 (2019)
한 초등학교 인근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낡고 미끄러워 사고 위험이 있다는 제안이 올라왔고, AI가 이를 ‘안전’ 카테고리로 자동 분류했다. 같은 장소에 대한 유사 제안이 3건 이상 올라오자 시청은 48시간 내 현장 점검을 실시했고, 2주 안에 보수 예산을 승인해 해당 시설을 교체했다.
급식 반찬 개선 (2020)
“급식이 짜요”, “고기가 질겨요”, “반찬이 자주 똑같아요” 등의 제안이 수백 건 접수되었다. AI가 이를 요약해 ‘식자재 다양성’과 ‘맛 만족도’로 재구성했고, 교육청은 외부 영양사 및 학생 자문단과 함께 식단 개선 TF를 구성했다. 그 결과, 급식 납품 업체가 변경되고, 시범학교 12곳에서 새로운 메뉴가 적용되었다.
학교 주변 쓰레기 문제 (2021)
“학교 앞 길거리에 쓰레기가 많아요”라는 제안은 ‘청결·환경’ 항목으로 분류되었고, 이후 청소 예산 확대와 함께 지역 청소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해당 캠페인은 지역 중학생 40여명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 지역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이 플랫폼은 교육과 행정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헬싱키시 교육청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해당 플랫폼을 사용하는 법을 정규 수업 시간에 가르치며, 사회과목 및 시민교육과도 연결해 아동의 정책 감수성과 주체성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있다.학교에서는 학급별로 ‘의견 작성 주간’을 두어, 학생들이 경험한 불편함을 공유하고 함께 작성하는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는 공동체 감각을 키우는 동시에, ‘내가 말한 것이 실제로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실증적 경험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책 참여 의식을 매우 효과적으로 고양시킨다. 또한, 학부모와 교사 역시 플랫폼의 피드백 대시보드를 함께 열람할 수 있어, 가정과 학
교, 지역이 함께 연결된 정책 반영의 흐름이 형성된다.
이 플랫폼은 2020년 유럽연합(EU)의 디지털 민주주의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으며, OECD, 유네스코, UNICEF 등 국제기구에서 헬싱키 사례를 ‘참여 기반 스마트 거버넌스’의 대표 모델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스웨덴, 독일, 캐나다 토론토 등에서 벤치마킹이 이루어졌고, 2023년에는 브라질 상파울루가 이를 도입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와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청소년참여위원회, 학생자치회 등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정책 반영력이 낮고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헬싱키와 같은 플랫폼형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에 적용될 수 있다.
[티비유=최원경 리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