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보고 동상-
(황상석 관장은 완도버스터미널에서 기자를 만나자마자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 후 장보고 동상으로 안내를 했다. 이동하는 짧은 차 안에서도 황상석 관장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장보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장보고에 대해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기자 출신 답게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모습속에서 황 관장의 남다른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방문지는 장보고 동상이었다.)
사라 태풍 덕분에 청해진이 발견되다
양태석_ 안녕하세요? 관장님. 이렇게 제가 완도까지 오게 되었는데요. 완도에서 장보고를 기리고 알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황상석_ 네, 우선 완도는 장보고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역사책에서 익히 알고 있던 청해진이 있는 곳이지요. 보통 해양 진출의 영웅은 장보고, 해양을 방어하는 영웅은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완도는 장보고와 이순신 이 두 인물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특히 장보고의 청해진이 발견된 계기는 1959년 엄청나게 센 태풍인 사라때문인데요. 그 태풍 으로 인해 바닷속에 묻혀 있던 큰 원목열 나무가 촘촘히 박힌 게 300m나 발견됐어요. 이게 언제 생긴 것인지 탄소 측정을 해보니까 9세기로 나오는 거예요. 그 기간을 따져보니 바로 역사책에서 등장하는 장보고가 지은 ‘청해진’이라는 결론이 내려지죠.
본래 청해진이 있던 자리를 일반 백성들은 ‘장군의 섬’이라 해서 ‘장도’라고만 불렀었어요. 발견당시만 해도 장도에서는 그냥 농사만 지었지요. 사라 태풍 이후 10년 동안 청해진에서 발굴을 했는데, 두 가지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청해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물이 있었던 거에요. 병사들이 살았다는 증거죠. 청해진은 조석간만의 차로 인해 밀물때는 잠기고 썰물때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어요. 그런데 밀물때는 청해진에 있던 사람들이 마실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우물을 판 거에요. 두 번째 청해진에서 매납유구라는 제사 때 쓰던 유물이 나왔어요. 큰제사, 중제사, 소제사 중 중간 크기의 제사에 쓰이는 유물이 나온거죠. 그래서 청해진은 사적 308호로도 지정되었습니다.
반역자의 꼬리표를 뗀 장보고, 해상왕이 된 배경은?
양태석_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황상석_ 네, 그렇지요. 청해진은 851년에 폐진되고 500년 동안 아무도 살지 못했어요. 공도로 있다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넘어왔지요. 장보고에 대해 반역자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장보고라는 이름 자체를 거명하는 게 불온 사상이 있다고 본 거죠. 그래서 장보고와 관련된 것이 다 잊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권근이 장보고는 반역한 인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최부의 표해록에 보면 최부가 중국에 표류했는데, 중국 사람들로부터 장보고 이야기를 듣고 그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반역한게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1928년에는 최남선 선생이 장보고를 ‘동방의 해왕’으로 표기하고, 1934년 연세대 김상기 교수는 장보고가 ‘해상 상업 제국’을 건설했다는 논문을 내서 평가하면서 국민의 정부에서는 장보고가 반역자 신분에서 이제 해상왕이 되었고, 최인호 작가 덕분에 ‘해신’으로 돼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후 평가가 없었더라면 장보고는 그냥 잊혀진 인물이었겠지요.
절대 왕정 체제에서 장보고가
사무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양태석_ 정말 그랬겠네요.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훌륭한 한국인을 그냥 반역자로 몰 뻔했네요. 그런데 장보고는 무역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하는데 어떤 무역을 했나요?
황상석_ 기자님,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당시 절대 왕정체제에서 사무역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는 백성은 물론 백성들이 생산하는 물건들도 다 왕과 황제 것이었으니까요. 무역을 한다면 관영무역밖에 없었겠지요. 철옹성처럼 관영무역밖에 없던 상황에서 사무역을 만들어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요.
저는 장보고가 장보고가 어떻게 사무역을 활성화할 수 있었는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14년이 걸렸습니다. 한중관계사를 공부하면서 결과론적으로 제가 단서를 얻은 게 뭐냐 장보고가 828년에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만들잖아요. 그리고 돌아가신 연대는 일본의 기록으로는 841년이고, 신라의 기록에는 846년이에요. 기껏해야 14년 동안 사무역으로 한중일 해상 무역을 독점했다고 하는데요. 지금처럼 교통 통신이 발달되지도 않은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바로 당시 대량으로 이주했던 중국의 재당 신라인 사회가 있었고, 일본에는 재일 신라인 사회가 글로벌네트워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들은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다 이주를 해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아 기반을 쌓은 거지요. 오늘날 같으면 중국의 조선족이나 일본의 민단이나 조총련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거에요. 그 기반 위에 장보고가 사무역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만약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 헤이안 시대 일본의 승려 엔닌이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우고 오는 구법 과정을 4권으로 기록한 일기체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중 장보고와 그의 휘하 재당 신라인 사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해 알게 된 것이지요.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장보고 성역화를 제안한 사연
양태석_ 해상왕 장보고라고 불리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황상석_ 장보고라는 영문표기는 ‘Chang Po Go’로 하는데, 주일대사를 지낸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의 저서와 논문에서 처음 그렇게 표기했어요. 라이샤워는 하버드대 교수를 하면서 엔닌 스님의 기행문을 가지고 두 개의 논문을 발표했는데요. 이 두 논문에서 장보고를 1955년 당시 ‘해상 상업제국의 위대한 무역왕’으로 표기했어요.
그러다가 1962년 영국에서 기업인 세계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삼성그룹을 만든 고 이병철 회장님이 가신 거에요. 그랬더니 당시 유럽 기업가들이 한국에서 왔으면 장보고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했는데, 제대로 설명을 못한 거에요. 국내에 와서 완도를 가서보고 장보고 자료를 수집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장보고를 전 세계에 내세우면 우리나라의 물건을 파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라고 건의를 했어요.
그런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만큼 장보고가 반역자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이 못 마땅한 거죠. 그래서 장보고를 안 내세우고 이순신 성역화 사업을 합니다. 만약 이때 장보고를 성역화했으면 우리나라 상품들이 좀 더 팔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럽 사람들은 ‘해상총독’이라는 단어가 17세기에나 등장하는데, 라이샤워 교수가 9세기에 장보고를 총독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유럽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엄청 앞선 인물이니까 장보고에 대해 더 관심이 컸던 것이지요. 유럽은 이런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아주 오래된 문화가 있으니까요.
청해진 현장에서 본 우물과 목책의 흔적
(물이 빠진 썰물 때 청해진을 방문한 터라 물이 빠진 바다 위를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황상석 관장은 9세기로 추정된 목책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일렬로 쭉 박혀져 있는 목책을 보고 과거 역사의 흔적을 직접 눈으로 봤다는 황홀함에 빠졌다. 해상왕 장보고가 활동했던 청해진에 와있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과학기술의 발달이 청해진임을 증명해준 것에 대한 놀라움과 앞으로의 세상은 또 어떤 것을 증명하게 가능하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9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목책이 사라 태풍으로 인해 발견되었다. 장도가 청해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단서 중 하나.
양태석_ 청해진에 저희가 왔는데, 한 번 설명을 해주시지요?
황상석_ 네, 여기가 바로 청해진인데요. 장도라는 곳이 원래 굉장히 가파라요. 입구만 완만한데요. 여기에 본래 사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보고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세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해양수산부와 해운항만청에 출입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보고를 이야기하면 주위에서 왜 반역자를 자꾸 이야기하냐고 할 정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거든요. 그러다가 IMF가 터지고 난 후 도전과 개척 정신이 강조되고, 금모으기 운동을 하면서 장보고를 성역화 사업으로 진행한 거죠. 그 전까지는 그런게 없었어요.
양태석_ 이곳이 아까 말씀하신 우물이군요?
황상석_ 네, 맞습니다. 우물 주위에서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어요. 이런 발견 덕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 건데요. 그리고 이게 토성입니다. 떡시루 양식을 한 것을 통해 판축토성으로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있었지요.
- 장보고 한상 명예의 전당 -
2022년 수상자로 선정된 승은호 코린도 그룹 회장
양태석_ 제가 이제 장보고 한상 명예의 전당에 왔는데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 한번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황상석_ 네, (명예의 전당 출입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시되어 있던 2022년 수상자를 보고) 작년 장보고 헌장자로 대상에는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님이 선정되셨습니다. 매출액 10억달러로 종업원이 2022년 기준 2만명에 달합니다. 코린도 인도네시아 원목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물류, 에너지 발전 등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국회의장상으로는 이숙진 제마이홀딩스 회장을 선정했습니다. 이숙진 회장은 상업용 건물 청소업을 하는 업체로 호주 전역 200여 개 사업현장 총괄 빌리지 플라자 쇼핑몰도 운영하고 호주내 한인신문 톱뉴스 Segi홀딩스를 운영하는 호주달러로 5천만 달러의 매출을 내는 회사입니다. 또 최경주 골퍼를 선정했습니다. 같은 해에 베트남에서 미국 간호사들이 입는 유니폼 70% 공급하는 김경록 갈텍스 대표, 말레이시아에서 K-푸드 도매·소매·프랜차이즈를 하시는 이마태오 KMT 그룹 회장, 필리핀 유니그룹 회장으로 필리핀 한세인들을 도와주는 등 큰 일을 하시는 장재중 회장님이 2022년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장보고한상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changpogo.kr)에서 그동안 수상한 역대 수상자들의 창업 성공스토리와 수상자 자료를 챙겨볼 수 있다.)
양태석_ 이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요?
황상석_ 아, 이 그림은 장보고 청해진 본영이고, 우리가 해외에서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와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장보고가 우리의 뿌리요,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격렬하게 포옹하는 장면입니다. 완도 출신 신선 화백이 그려준 것입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탄생
양태석_ 장보고는 알겠는데, 왜 한상이라는 말을 함께 쓰나요?
황상석_ 청해진 장보고 대사는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재당 신라인 사회, 재일신라인 사회를 묶어 ‘한민족 디아스포라’라고 학술적으로 하는데요. 일본에는 150만명이 넘어갑니다. 우리가 일제의 침략을 받았지만 이때는 일본을 개화시키고 하나의 선진 문물을 전달하는 우월적 입장에서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나라에 있던 사람들은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웠을 때 포로로 잡혀가거나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백제가 망해서 끌려간 사람들도 있고요. 고구려가 망해서 끌려간 사람도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통일신라 전에 간 사람이나 통일 이후 간 사람들이 중국사회에서 재당 신라인 사회로 오늘날로 말하면 코리안타운을 형성해 살았습니다. 장보고는 중국, 일본, 한국 정사에 다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누구로 할 것이냐고 이야기할 때 장보고 청해진 대사를 이야기한 거죠.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1863년 처음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13가구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농업이민을 갑니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중국 간도에 많은 사람이 건너가고 일본으로도 건너갑니다. 해방 전에는 강제로 징용되거나 끌려가거나 위안부로 가거나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대거 갑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에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건너가고 독일에 간호사로 가고 남미로 농업이민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2024년이면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민 역사가 160년이에요. 160년 동안 한민족이 대거 이주하고 가서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재외 동포 경제인 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합쳐서 한국 상인, 한상이라고 표현해요.
양태석_ 아 그렇게 탄생한 말이었군요.
황상석_ 한상이 너무 많으니까 대표적인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장보고 한상이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처음에 이 단어를 이야기하니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이 장보고 밥상이냐고 그러더라고요. 한상 그러니까요. (웃음) 17세기 중반부터 간도, 만주,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에 끌려가거나 강제로 가거나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현재는 189개국 750만명이나 됩니다. 이 사람들을 제일 동포 경제인이고 불세출의 영웅 한민족의 사표인 장보고와 글로벌 시대 민간외교와 해외 시장 개척의 첨병인 한상을 결합한 ‘장보고 한상’이라는 단어로 불린 것이지요.
양태석_ 장보고 한상 명예의 전당을 있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황상석_ 제가 2016년부터 장보고 한상 어워드를 제정했고, 2012년에는 광주광역시에 허가를 받아 사단법인 장보고CEO포럼을 만들었습니다. 2013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 사단법인 장보고 기념사업회를 조직했는데요. 그러다가 제가 2011년 장보고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논문을 쓰고 강의하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장보고 같은 인물을 만들어내자는 목표로 광주광역시에 장보고 같은 거상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이게 채택되어 광주광역시 대학 졸업생들을 해외로 9개월동안 인턴십 보내는 프로그램을 총괄했어요. 3개월 동안 교육시키고 1개월은 국내기업에 가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게 하고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 국가와 중국에 6개월 보내 이 학생들을 글로벌 인재로 만드는 일을 추진했어요. 중국에서 이 아이들을 받아주는 사람들을 찾다가 한상을 찾게 된 거죠. 그랬는데 책에서만 봤던 장보고 같은 사람이 너무 너무 많은 거에요. 장보고와 한상을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하다가 2014년 베트남에 가서 강의를 하고 난 후 이분들의 반응을 보고 2015년 장보고 한상 어워드를 만들고 장보고 한상 명예 재단을 만들자고 제안해 받아들여진 거죠.
양태석_ 그렇군요.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하는데, 관장님께서는 현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결과를 만들어내신 것 같습니다.
황상석_ 2016년 두 조직이 통합돼 장보고글로벌 재단을 만들고 장보고 발굴 프로젝트를 시작했지요. 이 상을 만든 배경은 드라마 ‘해신’ 때문이에요. 해신 드라마 덕분에 장보고는 많이 알려졌지만 장보고의 전략이나 성공비결은 전혀 받아드릴 생각은 하지 않고 연애나 하는 사람으로 인식을 하더라고요. 국내에서는 그렇게 제한적으로만 인식했는데, 제가 보기에 장보고와 제일 닮은 사람은 해외에 나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한상이거든요. 그래서 이분들 중 몇 분을 선정해 인증상을 주자고 해서 장보고상을 만들었어요.
장보고 한상 명예의 전당에 오르려면
대한민국 경제와 문화 영토를 확장한 공로 있어야
양태석_ 그렇군요. 이 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한가요?
황상석_ 장보고의 도전과 개척 정신을 계승한 재외 동포 경제인 중 가장 중요한 게 대한민국 경제와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데 공로가 있어야 해요. 둘째 거주국 한인 사회가 발전해야 해요. 돈만 버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해야 해요. 또 가장 중요한 게 한민족 정체성이 함양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수상자 분들은 대개 자식들을 군대에 안보내도 되는데, 다 군대에 보내고 심지어 해병대에도 보내요. 이런 사람들을 이 시대의 장보고라고 인증하는 상을 주고 있어요. 6개 부문에서 매년 수상자를 배출시키고 있어요. 이곳 명예의 전당은 이런 장보고의 위대한 업적와 장한상 어워드에 선정된 분들을 전시하는 곳습니다. 이곳은 헌정으로 명예의 전당으로 추대해서 갖다 바치는 것이죠. 과거의 장보고를 오늘날 소개해서 우리나라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미래 장보고를 만들기 위해 이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습니다. 이 명예의 전당은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글로벌 인재로 만들기 위한 꿈의 전당으로 만들려고 지금 운영하고 있습니다.
111개 버킷리스트 이룬 존 고다르 본받아
명예의 전당을 찾은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키우게
양태석_ 명예의 전당 아이디어는 누구로부터 얻으신 건가요?
황상석_ 이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존 고다르라는 사람이에요. 이분은 2013년 돌아가셨는데, 15살 때 할머니와 외숙모간에 대화를 듣고 노트에 127가지의 꿈의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이게 버킷리스트죠. 그런데 그 꿈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인 이집트 나일강 탐험하기, 아프리카 중부의 콩고강 탐험하기, 에베레스트 산 오르기, 달 여행하기 등 일반인들이 하기 어려운 것들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고다르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에베레스트 산도 올라갑니다. 127개 꿈의 리스트 중 111개나 달성하죠. 그러니까 꿈을 간직한 사람은 꿈을 실천할 수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은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죠. 저희도 장보고 비전 캠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인지 본인이 직접 써서 발표를 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연예인을 만나는 게 꿈이더구만요.(웃음)
양태석_ 그렇군요. 명예의 전당을 만들게 된 가장 큰 목적은 무엇인가요?
황상석_ 재외 동포 1세대는 괜찮지만 2·3·4세대들은 외국에 태어나다 보니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어도 점점 잊어버리지요. 외국 사회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주류 사회에 진출을 하든지 아니면 대부분 왕따를 당하지요. 이 사람들에게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알려주고 선조의식을 갖게 해주어야 해요. 고향에 대한 정취도 알려줘야죠. 유태인이나 화교들은 2500년이 지났는데도 모국에 대한 문화를 기억하게 하고 모국에 투자도 많이 하죠. 그처럼 명예의 전당을 통해 재외 동포 세대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스토리를 전시해 미래 장보고를 육성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세계 퍼져 있는 한상들과 모국기업들이 상생협력을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또 가장 중요한 건 다문화를 하나로 만든 융합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장보고로 박사학위까지 딴 황상석 관장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비교 분석
양태석_ 장보고를 연구하셔서 박사학위까지 따셨다고 들었습니다.
황상석_ 네, 맞습니다. 제가 4세기부터 9세기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해 비교분석을 하였는데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연구에서 발생, 성장, 해체 등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순환론적 문명사관을 토대로 한민족-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닮은 점 9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우선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대정신은 개방화, 국제화, 자유화, 네트워크였는데, 19세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개방화, 세계화, 자유화, 네트워크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도 보면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활동할 당시 한반도는 발해와 신라 남북조 시대였는데, 현재도 남북한 분단 70년이 맞이하고 있습니다. 기술활용에 있어서도 해상운송기술을 통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듯이 현재는 IT를 활용하여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무역체제는 관영무역체제에서 사무역으로 확대되었는데, 현재도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재외동포의 경우 재당, 재일 신라인사회를 형성해 이민족 이주를 허용했는데, 현재는 180개국 750만명의 한민족경제공동체가 있으며, 국내 거류 외국인이 236만명에 달합니다. 대외개방 후유증에서도 유사점을 보이는데, 한민족 디아스포라 시절에는 청해진 호화 사치품 유입으로 신라사회풍습이 문란해져 흥덕왕이 금지시켰는데, 현재도 세계화 선언이후 OECD에 가입하여 외자의 국내유입이 급증하여 IMF사태 등을 맞았습니다. 국제관계에서는 한자와 율령제, 조용조, 유불교를 공유했듯이 현재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편입했습니다. 문화에 있어서도 통일신라 당시 신라상품을 염불(간절히 그 물건을 갖고 싶어함)했고, ‘매신라물해’를 통해 통일신라 제품이 전세계에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한류열풍이나 K-POP에서 알 수 있듯이 전세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해양력에 있어서도 통일신라시대의 경우 중앙에 선부를 설치하고 해운 조선술이 탁월했고, 현재도 해양수산부가 설치되며 세계 5위 해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상과 모국기업인 간 단절된 관계를 잇고자
매년 상생 파트너십 대회 열어
양태석_ 정말 그때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이 흡사하네요. 귀한 연구를 하셨습니다.
황상석_ 감사합니다. 저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장보고 한상 어워드를 만들어 단절되었던 것을 잇게 하고 싶어요. 작년에 한상모국기업인 상생파트너십 대회를 했는데, 해외에 나가서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많다는 거에요. 그건 말이 안되잖아요. 모국 기업들은 해외에 갑질만 하지 도움을 주는 게 별로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아요. 그래서 작년 한상과 모국기업 상생 파트너십 대회를 열어 최경주 골퍼와 골프를 하게 했는데요. 전 세계에 있는 한상들이 최경주와 골프를 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 먼 완도까지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최경주가 미국남자프로골프투어(PGA)에서 최경주가 승리를 할 때 한상들도 신분 상승을 경험한 거에요. 최경주가 ‘코리안탱크’로 이름을 날리니까 현지 사람들도 최경주의 나라가 대단하다고 생각한거죠. 이렇게 사람들이 연결되는 겁니다. 올해는 11월 27일부터 28일까지 여수에서 상생파트너십 대회를 개최합니다.
- 한상 명예의 전당 이모저모 -
장보고의 일대기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어
중국에서는 장군, 일본에서 재물의 의미가 커
양태석_ 명예의 전당에는 교육을 목적으로 장보고에 대해서도 잘 소개가 되어 있는데요. 한번 설명을 해주시지요.
황상석_ 네, 장보고는 790년대 탄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속일본후기’에는 841년 11월, ‘삼국사기’에는 846년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신무왕 왕위 쟁탈전에서 장보고와 라이벌이 김양인데요. 김양은 소부령 군 서열 4위였는데, 이 사람이 염장을 사주해 장보고를 죽이게 합니다. 본래 장보고의 딸이 문성왕 둘째 왕비가 되도록 예정돼 있었는데, 대신 김양의 딸이 갑니다. 그 다음 출생지는 삼국사기에 해도인(조음도) 오늘날의 완도로 되어 있어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에는 ‘궁복’이라고 불렀고, 당나라에서는 장보고(張保皐) 지킬 ‘保(보)’자에 언덕 ‘皐(고)’자를 써서 나라를 지키는 장군의 이미지가 있고,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高)로 재물의 이미지가 있어요. 보배로울 ‘寶(보)’자에 높을 ‘高(고)’자를 쓰지요. 일본에서는 재물신, 중국에서는 안녹산의 난 때 중국 최고의 영웅 곽분양과 동급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장보고를 추앙했습니다.
양태석_ 그 외 장보고가 남긴 유산들은 어떤게 있을까요?
황상석_ 장보고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형문화유산은 '적산법화원'과 '청해진'이 있습니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신앙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처였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목이 쓴 ‘변천문집’과 일본 고승 엔닌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장보고에 대해서는 불세출의 영웅이며, 한민족의 사표로 평가하고, 최초로 바다를 경영한 해상왕, 해신이라 불립니다. 1955년 주일 대사를 지낸 하버드대학교 E.O. 라이샤워 교수는 장보고를 ‘해양상업제국의 총독’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신라대명신, 적산대명신, 재물신이었고, 통일신라 선종의 최대 후원자였고, 세계적인 거상이며, 전략가, 경제가로 최초로 글로벌경영을 주도한 세계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양태석_ 정말 다양한 별칭이 있었네요. 장보고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황상석_ 장보고는 한민족(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부여) 디아스포라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외 이주해 정착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뿌리이며 원조이지요. 또 오지의 조음도를 수군기지, 국제도시 청해진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혼탁한 바다를 깨끗한 바다로 만드는 혁신 정신과 한중일 해상 민간무역을 독점하고 동서 교육을 주도한 글로벌 경영가였습니다. 더불어 관영무역체제를 국제 사무역시스템으로 전환시켰고, 글로벌 상단(견당매물사, 대일회역사)을 창단시켰습니다. 페르시아 상인과 중계 무역을 체결하고 통일신라의 경제 및 문화영토를 한·중·일은 물론 동남아, 중동지역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또 위대한 문화유산 고려청자, 다도를 후손에 남기고 당나라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항해사찰 적산법화원을 창건했습니다. 적산법화원은 다민족- 다문화 융합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장보고는
반역자의 이미지를 어떻게 벗게 되었나?
양태석_ 장보고라고 하면 반역자의 이미지가 있어 꺼러했던 때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과정을 거쳐 장보고가 전 국민의 좋은 모델이 되었는지요?
황상석_ 장보고 선양 패러다임은 반역자에서 정치적 복권으로 정부 차원에서 장보고 선양을 나섰는데요. 문화체육부에서 1993년 3월 문화의 인물로 장보고 대사를 선정해서 장보고 소책자 20만부를 발행해 배포합니다. 또 1998년 1월 21일 해양수산부에 ‘장보고재조명추진기획단’이 설치되고 완도에 장보고 기념관 및 장보고 동상이 만들어집니다. 서울에는 코엑스 해상왕상징조형물이 건립됩니다. 이후 1999년 10월 해상왕 장보고 재조명평가 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99년 11월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2000년 4월 해상왕장보고연구회가 설립됩니다. 이후 2012년 1월 (재)해상왕장보고 기념사업회와 재)한국해양재단에 흡수 통합됩니다. 1998년부터 2019년까지 시행된 1단계 선양 브랜드는 해상왕 장보고는 핵심가치가 절대 봉건왕조의 관영(공)무역을 국제민간(사)무역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시킨 것으로 1997년 IMF(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해상왕 장보고의 도전 및 개척정신을 통해 금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는데 활용됐습니다. 2단계 선양 브랜드는 세계인의 장보고로 세계인 장보고의 지역 및 국가발전전략을 오늘날 벤치마킹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감소에 따른 지방소멸 해법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초고령사회, 지방소멸위기
장보고에게서 해법을 찾다
양태석_ 지방소멸 해법을 장보고 정신에 찾을 수 있다니 놀라운데요? 구체적으로 한번 설명을 해주시지요?
황상석_ 장보고의 지역 및 국가발전전략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데요. 통일신라 오지였던 조음도에 청해진 수군 기지를 설진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최초 섬 지역에 수군기지를 건설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 국토균형발전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지역발전사례를 오늘에 활용 방안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서남해안에 암약하던 해적을 소통한 장보고는 탁월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활용해 해적을 소통하고 투항한 적을 포용했습니다. 장보고글로벌 상단(견당매물사와 대일회역사)를 결성하고 중국과 일본에 각각 파견했습니다. 중국 명주(오늘날 닝보)에서 페르시안상인과 중계무역을 체결하였습니다. 신라제품이 중동지역으로 수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지요. 셋째 통일신라의 경제 영토를 중동까지 넓혔습니다. 중동지리학자 이븐 후르다드비의 ‘도로와 왕국총람’에 보면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이슬람교도들은 끌려서 영국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랍에 수출된 신라의 물품은 비단과 검, 도기와 담비가죽, 사향 말안장 범포, 육계 키만카우 쿠란잔 등 11종이었습니다. 넷째 후손에게 고기를 잡는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중국 청자를 국제적으로 유통하는 역할에서 청자제조기술을 확보해 강진과 해남에 도요지를 건설한 것이지요. 훗날 고려청자를 태생시킨 선투자가 이뤄진 것입니다. 다도 문화를 정립해 후손들에게 전수하였는데, 이는 글로벌 인재 육성으로 지역 및 국가발전 모델을 제시하고 인구 감소로 지방소멸 해법을 모색하게 합니다.
다문화정책의 롤모델
적산법화원
양태석_ 지방소멸, 저출산 대책으로 요즘 다문화가정들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적산법화원이 좋은 다문화정책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신지요?
황상석_ 맞습니다. 적산법화원은 추석문화로 다문화 융합공동체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적산법화원을 창건했는데요. 당나라에 거주하던 한민족(백제 및 고구려 유민, 신라 및 통일신라인, 부여 포함)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820년대 초 항해사찰을 건립했습니다. 무역상단이 항해하면 적산법화원 상주 스님들이 염불과 불경암송으로 안전 항해를 기원했고, 한중일 해상민간무역을 독점하고 동서 교육을 주도했습니다. 청해진 법화사와 서귀포 법화사 건립 등 동아시아 법화네트워크도 구축했습니다.
적산법화원의 사회봉사활동은 문화로 다민족융합공동체를 실현시켰습니다. 법화원을 드나드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민족을 포용하고 이질적인 다민족과 함께 법회를 보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음악과 가무 등 문화로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모델을 제시한 것이지요.
또한 신라만의 고유 명절 추석을 동아시아로 전파했습니다. 엔닌 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서 발췌한 내용을 보면 “절간은 수제비와 떡을 마련하고 8월 15일의 가절을 경축하였다. 이 가절은 다른 나라에는 아직 없다. 신라국에만 유독 이 명절이 있다.(중략) 많은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사흘만에야 끝이 났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이 가절의 축하행사를 마련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라만의 추석이 장보고가 창건한 적산법화원을 통해 중국와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로도 전파되었습니다. 장보고의 이런 삶을 통해 오늘날 국제결혼가정과 해외이주근로자, 유학생들이 코리안 드림을 이룩하도록 포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양태석_ 관장님께 열정을 많이 느끼는데, 지금도 연세도 있으신데도 이렇게 열정을 갖고 임하게 되신 힘의 원천이 궁금합니다.
황상석_ 저를 이렇게 만드신 분이 계세요. 예전 해운항만청의 신길웅 국장님이 현재 돌아가셔서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데요. 이분이 제가 세계일보 기자생활을 할 때 자꾸 만날 때마다 장보고에 대해 글을 좀 쓰라고 하는거에요. “너는 완도 출신이고, 기자니까 한민족의 사표인 장보고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시는 거에요. 제가 일간지 기자라 바쁘니까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그런데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출입처를 농림부로 바꿨는데, 김성훈 농림부 장관님이 계실 때 이분도 저를 만날 때마다 자꾸 장보고 책을 쓰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제가 책을 쓰면 좋겠냐고 했더니 김성훈 장관님께서 다 코치를 해주시더라고요. 우선 중간 제목들을 다 정리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일하기가 좀 수월하잖아요. 중간 제목들을 정리해가지고 장관님께 갔는데, 그 바쁘신 김성훈 장관님께서 1시간동안 결제도 하지 않고 교수가 대학원생 코치를 하듯이 감수를 해주시는 거에요. 책 제목도 바꿔주셨어요.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 그렇게 제가 책을 쓰게 됐죠.
제가 장보고에 대해 연구를 해보니 결국 장보고가 성공한 방법은 해외에 있는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였는데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는 IT로 그게 가능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마침 당시 일했던 세계일보에서 세계닷컴이라는 인터넷팀을 꾸릴 때 제가 자원을 했어요. 그곳에서 제가 장보고에 대해 배운 것들을 접목시켰죠. 그렇게 8년동안 세계닷컴 대표를 하면서 장보고의 전략을 하나 하나 펼쳤더니 세계일보가 인터넷신문 중 제일 꼴지였는데, 제가 나올 때쯤에는 일간지 기준으로 경향신문을 앞서는 단계까지 오르게 되었어요. 그런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장보고의 전략이 오늘날에도 이제 적용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 광주광역시에 와서 전남대에 유일하게 디아스포라 학과가 있는데요. 그 대학원에 들어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서강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어요. 제가 이제 걸어온 길을 보면 제가 뭘 하겠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어떤 거대한 힘이 자꾸 그냥 자리를 만들어 준거에요. 오다 보니까 이렇게 왔는데, 그 전략이 뭐냐면 장보고는 인간적 관점으로 보면 최악의 반역자로 몰렸다가 점점 해상왕이 되고 이런 전략이 이제 빛이 나는데 장보고에 찬란한 영화가 있어요. 이걸 오늘날 복원하는게 제 미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그런 전략을 출시한 것입니다.
후배 기자들에게 전한다
전문성을 살리고 통시적 관점에서 연구하라
양태석_ 언론인으로 참 모델이 되시는 것 같아요. 언론인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세요?
황상석_ 언론인들에게 뭘 말할 그런 위치는 아닌데, 적어도 기자는 다양한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특정 전문 분야를 나름대로 갖추면 다른 전문가보다 굉장히 빨리 기반을 잡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언론인만의 특성이 있잖아요. 지금도 AI로 간단한 것은 다 자동화하지만 나름대로 통찰력있는 전략을 갖추지 않으면 이런 경쟁 시대에 기자로서의 경쟁력을 생기지 않습니다.
장보고를 연구할 때도 보통 역사 연구 방법론을 보면 공시적인 관점을 택하는데, 저는 통시적인 관점을 택했어요. 공시적 관점은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만을 고려하는 관점이지만 통시적 관점은 특정한 무언가의 시간의 흐름을 고려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보고에 대해 전 생애를 연구하신 분들도 여러 분 계세요.
그런데 저는 그때 시대와 지금 시대를 양쪽 시대로 통시적으로 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장보고 한상 어워드’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공시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지요. 그래서 제 경쟁력이 높아진 것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 기자들도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공시적 관점보다 넓은 관점, 전략적 관점에서 보는 통시적 관점을 갖고 자기 분야를 연구하면 좋겠어요. 기자들은 통시적 관점이 잘 어울립니다. 공시적 관점은 학자나 연구자한테 해당되는 개념이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기 전공을 계속 가져가야 합니다.
제가 언론생활을 한지 30년 되었는데, 뉴스 본부장을 하면서 회사에 기여는 안하고 맨날 장보고 일만 했거든요. 본부장이면 어디 가서 돈도 좀 벌어오고 해서 기자들 월급을 좀 올려주고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은 제가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거기에만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앞으로 전 세계를 지도할 수 밖에 없는 나라가 될텐데 그러려면 제일 많이 간직해야 할 사명이 전략가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봐요.
어르신들을 위한 행복한 은퇴 생활 코칭
평일은 지방, 주말은 도시 오가며 남은 여생을 즐기세요!
양태석_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해서 릴레이식으로 취재를 하고 있는데요. 같은 동녀배에 계신 어르신들을 비롯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는지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황상석_ 저희 연령대 중에서도 자기계발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노후가 풍요로워지고 상당히 의미있는 생활을 하지요. 그런데 그런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지금 고령화 시대에서는 대도시 중심적인 삶보다는 자기 고향이나 도외지로 가시면 좋겠어요. 자기 고향에 가면 굉장히 힘들어요. 단절되어 있으니까요. 옛날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과거처럼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속상하고 그런데 그걸 받아들여야 해요.
고향에 내려갈 경우 그런 다름을 인정하고 꼭 고향이 아니더라도 자기와 맞는 지역을 정해서 생활하시면 좋겠어요. 도시의 삶을 다 정리해서 내려오기보다는 우선 평일때라도 내려와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 있으면서 우선 하룻밤을 자보면 달라요. 하루 와서 자고 이틀을 자면 눈이 떠지죠. 저도 여수신문 사장과 광주광역시 뉴시스 본부장을 할 때 집이 여수에 있었는데요. 광주에 왔다가 여수에 내려가든지 아니면 여관방이나 호텔방에 자야 하는데, 그러다가 좀 여력이 생겨 광주에 원룸을 얻었어요. 그런데 그 전까지는 한 1년동안 아무리 다녀도 광주의 이곳 저곳이 눈에 안보이던데, 딱 하루 지나고 나니 주변이 보이는 거에요. 산도 보이고 말이죠. 마음의 추를 내리니까 보이는 거에요.
고령화된 분들이 도회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지방에 내려오면 훨씬 얻는게 많습니다. 일단 건강이 회복됩니다. 주변 로컬음식도 가져다 먹을 수 있고 얻을 수 있는게 많아요. 지역에 한 이틀 보내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보면서 주위의 맛집도 가보고 구경할 곳도 보고 그러면서 점점 영역이 넓어지고 사람도 사귀게 됩니다. 사람을 사귀다보면 부동산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지역의 부동산은 정말 도회지보다 아주 헐값에 살 수 있는게 정말 많아요. 처음부터 크게 생각할게 아니라 별장개념으로 머리가 아프고 쉴 공간이 필요하면 그냥 내려와서 쉴수 있는 곳으로 확보를 해두는 거지요. 그렇게 왔다 갔다하면 정이 들고 여러 기반이 마련되면서 지역민들과도 친해집니다. 그럼 도시로 올라가는 횟수도 줄어들지요.
저희 지역에도 최근 큰 공기업 대표도 하신 분이신데, 아내가 암에 걸렸대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완도 신지 명사십리에 와서 해조류 음식을 드신 거에요. 해조류를 먹은 후 완도 명사십리길을 걸으니 몸에 변화가 생긴 거에요. 한번 두 번 오다가 몸이 괜찮아지니까 아예 1년을 계약하고 지금 와 있으세요. 저도 명사십리길이 3㎞ 정도 되고 왕복 6㎞인데, 밤에 맨발로 가고 있거든요. 그냥 산에 걷는 것보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 모래사장에서 걸으니까 굉장히 운동이 되고 머리도 맑아지고 잠도 잘자고 굉장히 좋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어떤 일이 있냐면 당뇨가 심해서 당뇨약을 먹은 사람이 명사십리길을 걷고 났더니 당뇨 수치가 뚝뚝 떨어진다는 거에요. 이제는 완전히 약을 안먹을 정도로 변화가 왓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도회지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지역에 발판을 잡으면 훨씬 삶이 윤택해질 것입니다.
저도 11살 때 완도를 떠났어요. 장보고 일 때문에 2017년 뉴시스라고 광주전남본부를 매각하고 아예 장보고 일만 전념하고 있을 때 완도군에서 공무원으로 채용돼 왔는데요. 저희 딸도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일을 하고 제 아내도 몸이 많이 아파 도회지에서는 여름에 막 도저히 견디지 못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막 돌아다니고 수영도 하면서 이제는 아내가 도시로 안가려고 해요. 여기가 훨씬 좋다고 하죠. 그런 걸 실제 경험하니까요. 농사짓는 시골이 텅텅비고 있어요. 그런데 막 무턱대로 지역으로 이주하면 안돼요. 평일에는 여기에 와 있고 주말에는 도시로 올라가셔야죠. 다 거기에 인간관계가 있고 삶이 있는데 지역으로 내려와버리면 그 관계가 단절되잖아요. 그러니까 평일에는 지역에 있고, 주말에는 다시 도시로 가는 등 왕래를 하면 좋겠어요. 어르신들은 KTX도 30% 할인되고 부담이 덜하잖아요.
양태석_ 그런데 관장님이 안계시면 이 장보고 기념관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속가능성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계신가요?
황상석_ 그래서 감상문 공모를 하는 것도 전국적으로 진행을 하면서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응모하게 합니다. 이제 10년, 20년 쌓이면 해외에 이주해 정착한 분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느끼고 그 사람들이 미래의 장보고를 만드는 것이고, 세계 장보고 비전 캠프를 통해 지속적으로 장보고를 알리고 있습니다.
양태석_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친절한 설명까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 글을 통해 장보고에 대해 잘 몰랐던 많은 분들이 장보고를 알게 되고 무엇보다 해양을 개척하며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상생협력하며 새로운 살 길을 찾았던 장보고의 탁월한 전략을 벤치마킹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장보고한상 명예의 전당이 앞으로 지속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상석(黃相石) 관장 약력
현)장보고한상 명예의 전당 관장
현)사단법인 장보고글로벌재단 사무총장
현)장보고 글로벌 경영아카데미 주임교수
전) 세계일보 사회부 국제부 경제부 기자&정보사업단 이사
전) 세계닷컴 대표이사/여수신문 대표이사
전) 뉴시스 광주전남취재본부 본부장
완도군청 임기제 공무원(문화예술과)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위원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디지털미디어 전공(석사)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디아스포라학 협동과정 정치학 박사
주요저서
장보고를 알면 세계가 열린다(1999)
장보고의 글로벌경영 혁명(2017)
장보고의 후예 한상의 영웅들(2018)
2019 세계속의 글로벌 한국인 리더(2019)
상훈
행정자치부 장관상(2005년)
여수상공대상(2011), 여수상공회의소
장보고대상 국무총리상(2021), 해양수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