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공직구조는 프랑스나 일본과 같은 계급제(Rank Classification System)’인 반면, 영미는 ‘직위분류제(Position Classification System)’를 도입하고 있다. 계급제는 일정 수준 능력을 갖춘 인재를 채용한 후 순환보직을 통해 폭넓은 관리능력을 갖는 일반행정가 또는 관리자(Generalist)로 육성하는 데 우수한 제도인 반면, 직위분류제는 직위(Position)별로 자격을 갖춘 전문가를 채용하고 분야간 이동 없이 장기간 근무하는 전문가(Specialist) 양성에 장점을 가진 제도이다.
그렇다면 계급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공직사회는 과연 전문성은 어느 정도일까? 민간이나 학계보다 더 나은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을까? 전 세계공무원을 비교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불행히도 우리의 공직 전문성은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 아닐까?
짧지 않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늘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우리 공직자의 취약한 전문성이었다. 흔히 우리 공직사회에서는 “보직 받은지 한 달이면 업무를 파악하고 반년이면 준(準)전문가가 되고 1년이면 비전을 내놓을만큼 해당분야 전문가로 행세하다가 1년이 지나면 고참 대접을 받고 자리 옮길 준비를 한다”고 한다. 교수나외부 기업이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공무원이 보직 받은 지 6개월만되면 해당분야 전문가로 행세하면서 수십 년을 몸담아 온 자기네들을 리드하는 능력이 놀랍다(?)”라는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르는 말을 왕왕 듣게 된다.
우리 공직사회 공무원의 전문성을 떨어트리는 가장 큰 요인은 잦은 인사이동(전보)이다. 지난 2015년 인사혁신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실국장급인 고위 공직자가 한보직에 재직하는 기간은 평균 1년, 과장급은 1년2개월, 4급 이하는 1년 8개월에 불과하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30여년간의 공직생활 중 8차례의 계장과 5번의과장, 7번의 국장보직, 3차례의 1급, 두 번의 해외보직을 경험하고 국장시절에는 4년여 동안 무려 7번의 보직 이동이 있었으니 무슨 전문성이 있었으랴….
국가기록원장으로 취임하고 업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하나 있었다. 지난 2011년 11월 국가기록원은 ‘2016년 세계기록총회’를 한국으로 유치하고 그 후속조치로 국제기록기구(ICA)와 행사준비 MOU를 체결하였는데, MOU 제5조에는 “한국 측은 2016 총회행사가 끝날 때까지 행사 준비 관련자를 바꾸지 않는다”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 ICA 측에서는 그동안 반 년이 멀다 하고 행사준비 파트너(원장-부장-과장-담당자)가 바뀌는 것을 경험한터라 이를 우려하여 집어넣은 조항인 듯싶었다(ICA 측은 수십 년간 담당자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우리는 몇 개월 단위로 담당자를 바꾸는 바람에 그때마다 우리의 인사시스템을 ICA 측에 설명하고 양해를구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또 하나는, 과거에 지방자치국제화재단 뉴욕사무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미국현지의 많은 공무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미국 공무원들이 이해 못 하는 단어가 바로 “주기적으로 자리를 옮기는 전보(轉補, Transfer)”라는 개념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업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자료도 없이 한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막힘없이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의 공무원구조는 우리처럼 계급제가 아닌 직위분류제이고, 공무원으로 채용되면 거의 그대로 수십 년을동일한 직무와 직위에 머무르며 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Specialist)였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미 유학시절 환경과목을 수강하면서 경험했던 일인데, 당시 미 환경청(EPA) 공무원들이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업무보고서(실험결과나 정책평가등)는 전국의 학자나 기업에서 바이블처럼 참고하고 있어 공무원의 전문성은 오히려학자나 민간보다 앞서는 수준이었다.
전문성을 해치는 잦은 인사이동은 좋은 보직을 차지하기 위한 순차적 보직이동 관행에 기인한다. 보직 자체를 좋은 보직(승진이 빠르거나 권한이 막강한)과 그렇지 않은 보직으로 나누어 서열을 매기고, 좋은 보직의 보직자가 승진하거나 더 좋은 자리로 가면 차순위 보직자가 그 자리로 가는 소위‘한 클릭(Click) 보직이동(순환 보직)’ 관행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보직은 기실 따지고 보면 조직의 효율성이나 성과, 국민에 대한 서비스 차원이 아닌 순전히 공직인사 운영의 편의나 효율에 따른 것이다.
물론 정부는 고심 끝에 필수 보직기간을 두어 반드시 3년 이상 근무해야 보직 이동이 가능하고 유사한 직무분야에서 순환 근무하는 경우 2년을 근무토록 강제화 하였지만 순환근무는 여전한 것 같다. 주요 국정과제나긴급현안업무 수행, 인재 육성계획에 따른 전보 등 예외규정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 공직구조는 기본적으로 계급제에 기반을 두고 일반행정가(Generalist)를 양성하는 인력정책에 초점을 두어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 다양하고 역동적이며 고도로 세분화된 전문가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잦은 순환보직에 따른 취약한 전문성으로는 늘 2류나 3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미 전문성에 있어서는 민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공무원 인력 정책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해당분야에서 고도의 전문가(Specialist)로서 입지를 굳혀야 민간 또는 외국 공무원과 경쟁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순환보직에 대한 획기적 개선이 있어야 한다. 직위를 순환근무형 직위와 장기근무형(전문직위) 직위로 나누고 순환보직이 금지되는 ‘전문직위’ 지정을 더 늘려야 한다(정부는 내년부터 통상교섭, 안전, 세제 등 한 분야에서 꾸준히 근무할 수 있는 전문직 공무원제 도입 예정).현행 ‘필수보직기간(3년)’도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예외규정은 말그대로 최소화하여야 한다. 지금도 영미의 직위분류제적 요소(학예직과 연구직, 계약직 등 전문직 채용이나 외부전문가 채용을 위한 개방직과 공모제)가 일부 도입되어 있지만 인사제도의 주류가 될 때까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직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소위 내부적으로 관행화된 보직 서열화가 타파되어야 한다. 보직 서열에 따른 인사운영도 지양되어야 한다. 주무과장이나 주무국장이 우선 승진하는 구조가 아니라 어떤 보직에서든 이를테면 말석 과장이나 말석국장에 있다 하더라도 성과가 좋고 능력이 있으면 바로 승진하거나 원하는 보직으로 가는 관행구조가 정착되어야 한다.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현재의 계급제적 인력구조를 영미와 같은 직위분류제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직위에 걸맞은 자격자를 채용하고, 계약직으로 하되 주기적 평가를 통해 실적과 능력만 검증되면 그 보직에 장기간몸담는 그런구조로 전환되어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미래는 전문가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자생존(專者生存)’의 시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