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잉원 총통은 메르켈 독일 총리를 자신의 롤모델로 세우고 대만판 메르켈을 자처한다. 특히 차 총통은 독일 경제를 다시 일으킨 메르켈 총리처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1%대의 저성장늪에 빠진 대만 경제를 되살리고자 한다.
기획|양태석 기자
차이잉원 총통은 소수 민족, 여성, 미혼녀라는 불리함을 안고 있는 소수자다. 차 총통의 아버지는 푸젠성 객가출신이고, 어머니는 원주민인 파이완족 출신이다. 객가인은 중원에 살던 한족 중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전쟁을 피해 광둥성과 푸젠성 등으로 이주한 무리를 말한다.
남부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손님이었기에 객가(客家)라 이름 붙였다. 차 총통의 아버지는 부동산, 건설, 호텔 사업가로 5명의 첩을 뒀다. 그 중 차 총통은 장진펑의 딸로 11명의 이복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다. 차 총통은 미혼이고 정치 활동을 할 때화장을 하지 않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다녀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차이잉원은 대만국립대 법대, 미국코넬대 법학석사, 영국 런던정경대법학박사 학위를 딴 뒤 교수 생활을 하던 중 2000년 국민당 소속으로 처음 정계에 진출해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을 맡으면서 학계를 떠났다. 2004년에 민진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인이 된 뒤 총선에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2006년에는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이 됐고, 2008년에는 최초의 여성 당 주석이 됐다. 차이잉원은 천수이볜 전 총통의 든든한 후원 아래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2008년 당시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마잉주 후보가 승리하면서 8년간의 민진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천 전 총통의 부패상이 드러나면서 민진당의 존립 근거가 위협받았지만 차이잉원은 위기를 기회로 삼고 당주석이 된 3년간 9번의 선거에서 7차례나 민진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른바 대만판 선거의 여왕인 것이다. 2012년 대만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로 출마해 6% 포인트 차로 마잉주 총통에게 석패해 당 주석직을 내려놨다가 2014년 93% 당내 지지율로 주석직에 복귀했다.
차이잉원은 성격이 차분하고 말수도 적으며 엄격하지만 때때로 직설적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공부하다 보니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쳤다. 대륙위원회 주임(장관)으로 있을 때 딱딱 떨어지는 군대식 언어를 사용해 대만군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덕분에 임기가 끝난 후 국방장관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대륙위원회 주임으로 재직 중에 대만 독립 성향의 민진당 정권을 설득해 중국과 대만의 소삼통(통항, 교역, 우편거래)을 성사시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았다.
차 총통은 양안 관계에서 92컨센서스(하나의 중국 원칙)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현상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외교 부문에 대해서는 미국과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동남아, 인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남향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경제면에서는 미국 주도 TPP 가입을 추진하고, FTA를 확대하겠다고 한다. 또한 ‘스마트 타이완’이라 이름붙여 하이테크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민생과 관련해서는 8년간 20만 가구의 임대주택을 건설하고 최저임금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선거 개표 직후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대만 국민들이 표로 역사를 새로 썼다. 민주주의 정신으로 선거에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한 국민들에게 감사하다. 국민들이 견고하게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며 “저와 민진당에 다시 한 번 국가를 운영할 수 있도록 책임을 맡겨 주셨다. 대만이 일류 국가가 되도록 공약을 실천하고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