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새힘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대학원 수업학기가 끝났다. 명쾌하게 정리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명확한 점검의 필요를 느낀 현상이 있었다. 대학원생의 심리적 자원의 문제, 나와 동료들의 우울경험이다. 그것이 특정한 개인의 사안을 넘어선다는 점은 최근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김다혜의 석사학위논문(2020)[1]에 따르면 대학원생의 34.6%가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대학생, 중년 직장 남성, 중년 여성 등 특정 군집의 우울 평균 점수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그런가하면 원생의 24.5%는 최근 1년 간 자살을 생각했다. 동 연령대 한국인의 자살생각률(2.3~5.4%)보다 현저히 높은 수치이다. 2016년 서울대에서 실시한 인권실태 보고서의 분석이다.
대학원생은 왜 우울할까? 그물망과 같은 영향구조 속에서 그 계기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 가장 유력한 경제적 요인을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변수가 개입한다. 등록금 및 생활비 조달 방식, 주거의 독립 여부, 피부양가족의 유무, 근로자의 경우 근로형태와 노동시간, 임금수준 등 복합적인 층위가 존재한다. 반면 심리적 영역의 경우 학교 안팎에서 만난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큰 편차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건 자기효능감의 문제였다.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에 대한 믿음의 결여 말이다.
자기효능감의 저하
인문계 대학원생의 재학 중 연구에 한정할 경우, 자기효능감의 수준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토론 현장이다. 몇몇의 노력으로 논의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업 준비의 부족으로 토론할 만큼의 정보를 습득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이라 생각되지 않는 건 다른 경우다. 정보에 입각한 의견에 불확실성을 가지는 것. 어느 정도 알았음에도, 더 알지 못한 영역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을 뱉지 못하는 것. 동료들에 따르면 그것은 자신의 지식수준에 대한 검열심리에 기인했다. 나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렵사리 입을 떼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숙고가 필요했다.
소논문 과제로 넘어가면 자기효능감의 저하 수준이 더 높아진다. 내가 거친 4학기 동안의 제출물 가운데 만족감을 준 결과물은 없었다. 완성도를 차치하고 목표 도달 과정에서의 지난함을 언급하고 싶다. 하나의 소논문을 완성하는 데는 평균적으로 2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한 학기에 세 과목을 듣는 경우, 최소 6주는 외부에서 논문 준비를 하며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스트레스를 달래는 과자 뭉치가 책상 위를 나뒹굴고, 서른 개 이상의 참고문헌이 쌓여도 채워지지 않는 건 내 연구에 대한 신뢰감이었다. 리서치를 할수록 불안감과 검열심리는 강화됐고, 논증이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선명해져갔다. 그것은 글쓰기의 지연으로, 총체적인 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졌다.
소모되는 자원
스스로의 ‘멍청함’에 대한 선판단이 과업의 진행을 방해하는 한편, 멍청함에 대한 거부감은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끌어 쓰게 만들었다. 매 학기가 집중력, 끈기, 의욕, 지적 역량 등 정신적 자원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 이를 반복하면서 소진감이 찾아왔다. 검열과 되새김을 거치면서 연구라는 본래 목적을 초과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은 자에게 찾아오는 희열의 순간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여남은 시간은 고갈된 자원을 복구하는 데 쓰였고, 회복을 위한 휴지기는 점점 더 길어졌다. 넘을 수 없는 지식의 벽과 마주해 나는 자주 한계선을 넘어야 했다. 척도가 정해지지 않은 가용범위를 과다신용한 결과였다.
그 척도는 마지막 학기가 되어서야 정해졌다. 무리를 할 때마다 위경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선을 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 신체적 한계로 마지막 소논문의 기한은 이틀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박한 결과물이 해방감을 가져왔다. 내가 가진 자원이 고갈된 것을 너무나 명확히 직시했고, 목표치를 아주 낮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전개할 수 있는 논지는 꽤나 명확했다. 논의의 수준은 빈약했지만, 나의 장기가 더 손상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심리 외부의 세계
대학원생의 우울감을 유발하는 요인은 중층적이다. 그런데 자기효능감의 저하는 실패의 요인을 오직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귀속시킨다. 자기효능감의 조건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무관하게, 그것은 어느 정도 외부 결정적이다. 첫째,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따라올 것, 둘째, 자신의 수준을 인지적 왜곡 없이 직시할 것. 안타깝게도 인문계 대학원은 두 조건 모두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많은 경우 연구비에서 나오는 인건비를 기대할 수 없고, 장학금 혜택이 한정적이다. 학술지 투고나 학회 발표, 연구과제 수행 등 공적 학술 활동을 통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도 현저히 부족하다. 학위 취득이 구직 시장에서의 절대적 우위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원생들의 연구 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건 행정, 교육,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동과 학자금의 상환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적절한 보상이 따라오지 않을 때 자기효능감의 저하와 소진감은 짝을 이루며 찾아온다. 그것은 학문적 상호작용을 어렵게 하고, 개인의 성장을 저해한다. 심리적 고갈의 축적이 우려되는 건 과업의 포기로 이어지는 하강 곡선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휴학과 수료 이후 돌아오지 않는 원생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기를 거듭할수록 누군가의 사라짐을 경험한다. 남아있는 자들의 자리를 경험하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재능 있는 동료들의 침묵은 부정적인 신호를 보낸다. 고유한 질문들과 자기검열의 힘이 대치하는 곳에서, 고갈되고 있는 자원의 스케일을 감각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기대수준에 따른 투입량과 산출물, 보상 간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마지막 학기에서야 낙담 섞인 해방감을 가져다 준 기말 소논문처럼 개인의 멘탈리티에 기대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건 홀로 묵묵히 과업의 무게를 버티며 의지를 다지는 상황은 피해야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역량 문제로 실패의 원인을 돌리는 자폐적 경향, 그것을 감추는 자기은폐의 경험은 무엇보다 위험하다. 부족한 자원을 채우는 것이 내부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연구 환경 개선 등 제도적 보완의 차원이든, 동료 커뮤니티의 교류 차원이든, 친족 및 지인의 정서적 지지의 차원이든, 도움의 창구가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건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다. 자원의 획득이 아닌, 자원의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자기보호가 절실하다.
[1] 김다혜, 「대학원생의 자기효능감, 폭력 경험, 건강행위가 우울에 미치는 영향: Bandura의 상호결정론에 근거하여」, 인하대학교 대학원 간호학석사학위 논문,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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