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날마다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고통과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절망에 빠뜨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에 신물이 났다 ... 정치는 이래서는 안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겪고 정치를 결심하며 내뱉은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전쟁터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장기화로 인해 서민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뉴스에서는 연일 경기악화, 빚더미에 앉은 자영업자, 최고치를 찍은 연체율... 등 “코로나 때보다 힘들다”는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정치는 김여사, 탄핵, 명태균과 같이 민생에 아무런 도움 안 되는 이슈에 집중하며 윤 대통령 취임 이후 한시도 빠지지 않고 싸우기만 하고 있다. 이러한 정국 속에 우리는 논쟁과 대화, 타협을 통해 국민의 이익을 지켜나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혜를 되새겨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 VS 김대중
1964년 열린 6대 국회의 최대 관심사는 박정희 정권이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던 한일협정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해 경제원조가 절실했던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밀고 나갔다. 야당의 강경파는 한일협정을 매국이라고 주장하면서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김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협상한다면 야당도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야당을 포함해 반대를 주도한 사람들은 한일회담 내용도 잘 모르면서 매국이라 주장하기만 했다. 이면에 있었던 이들의 목적은 한일회담을 거부함으로서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려는 것이었다. 반대로 김대중은 협정의 내용을 치밀하게 파고들며 정부, 여당과 집요한 논쟁을 이어갔다. 동아시아 안보의 책임을 일본에게 분담시키려는 미국과 일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추진되는 협정인 만큼 한국이 교섭에서 유리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국익을 챙기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 정부가 무역적자 해소와 과거사 처리 방안을 요구하며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닌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탄핵이 과연 국익과 연결되는가?
현재 뉴스들을 보고 있자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향수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언론의 입장에서 볼 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그들에게 엄청난 업적같이 느껴질 수 있다. 세월호 참사로 시작되어 최순실 국정농단이 밝혀지면서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때 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최순실 국정농단을 파해 치는데 언론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국민들의 초대규모 촛불집회였고 집회의 시작은 세월호였다. 무려 230만 명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국회를 압박했을 때 새누리당 의원들이 느꼈을 공포는 탄핵소추안 표결 결과가 보여준다.
물론 야당의 입장에서는, 더 나아가 진보 쪽 언론에서는 이번 정부 탄핵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믿겠지만 과연 2016-2017 촛불집회에 필적할만한 여론이 형성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이태원 참사와 비교할 수 있는데, 세월호 참사는 이태원 참사에 비해 참사의 피해자들을 기리고 애도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며 그 규모도 훨씬 컸다. 더 나아가, 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는 보수 진영의 결집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크고 야당이 추진하려는 탄핵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기 쉽다. 이전 총선과 재·보궐선거가 보여주듯 모든 국민은 야당의 편은 아니다. 또한, 이재명을 싫어하는 국민들도 많기에 하나의 대규모 여론 형성이 힘들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은 이미 탄핵에 대한 경험이 있어 이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베테랑 검사 출신 대통령이 과연 탄핵당할 만한 불법적인 행위를 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정부의 잘못된 점은 고치고 비판하고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 싸움에 국익은 어디 있냐는 것이다. 김여사, 명태균, 의료대란 등 머리로는 이해 안되는 사항들도 많지만 아무도 건드릴 염두도 못내던 연금개혁, 이전 정부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인구문제 등을 실질적인 정책 테이블에 올려놓은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여서 부족하지만 또 다시 생각하면 윤석열 대통령이여서 가능했던 일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김대중의 화해 사상과 정치
2001년 3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초대해 용서하고 예우를 갖춘다는 것은 동화 속에나 나올만한 이야기다. 물론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은 선거에서 보수와 영남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를 외면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논란이 되는 사안이다. 그러나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은 최후진술로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라고 한 점을 보면 용서와 관용을 통한 국민 통합은 항상 그와 함께 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전·노 사면과 전직 대통령 예우는 국정운영 측면에선 분명한 플러스 요인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로 전례 없는 어려움에 직면한 나라를 통합하고 국민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데 도움을 줬다. 또 소수파 진보 대통령으로서 보수 진영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 대통령은 어떠한가? 강대강으로 대립하지만 얻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국민들이 걱정하는 의료대란은 여당과 정부가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뒷전이 됐다.
어느 샌가 우리나라 정치에 진정한 애국자는 없어지고 애당(黨)자, 애처가만 남은 것 같다. 국가는 당을 초월한 단위이고 대통령이란 자신의 우선순위를 모두 국민에게 맞추는 자리이다. 자신을 내려놓고 논쟁과 대화, 타협을 통해 국민의 이익을 지켜나갔던 김대중의 지혜를 되새기며 여·야·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타협할 수 있는 정치를 꽃피우길 바란다.
[지방정부티비유=티비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