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법성포 구경도 하고 영광굴비 식사도 하고
전남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영광굴비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음식은 생명이다. 배고픔은 한(恨)이 되고 가난한 시절에 보리밥 한 그릇은 평생 기억하고도 남는다. 보리밥에 굴비 한 마리, 그것은 환상이었을 것이다. 굴비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방 한가운데 매달아놓고 쳐다보면서 밥을 먹었을까?
영광굴비 주산지는 ‘법성포’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뜻한다. 서기 384년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최초로 들어온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법성포는 서해안 항구 중 유일하게 바다에서 약 4㎞ 내륙에 있어 방파제를 쌓기 어려운 시절에 파도가 밀려오지 않아 항구로서는 최고의 안전한 조건을 가진 곳이다. 고려 초엽에 개설된 부용창(현 법성항)은 영산창과 함께 전라도 2대 조창의 하나였다고 한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앞까지 물이 들어와서 호수와 산이 아름답고, 민가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해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창에서 왔다는 장흠식·황수득 부부는 “영광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도 구경하고, 맛있는 영광굴비를 먹을 수 있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영광굴비는 당초에 조기라고 불렀으며 옛날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생선이다. 특히 조기(助 도울 조, 氣 일어날 기)는 기운을 돕는 음식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빠져서는 안 될 생선이었다.
조기가 굴비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고려 17대 인종 때인 1126년 난을 일으켜 지금의 영광 땅으로 유배된 이자겸이 조기를 먹었는데 그 맛이 기막혔다고 한다. 이자겸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 토굴에 돌로 눌러놓았다가 바닷바람에 말린 조기 맛에 반해 인종에게 진상하며 “비굴(卑屈)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굴비라는 이름을 붙여 보냈다. 이때부터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의 굴비(屈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법성포항은 언제나 배들이 북적이고 조기잡이가 한창인 봄철이면 칠산 앞바다에 활기가 넘쳐 해마다 곡우(음력 4월 20일경)가 되면 칠산 앞바다에 알이 꽉 차고 통통하게 살찐 조기 떼가 몰려왔다. 이때 잡은 참조기를 ‘곡우사리’라고 한다.
영광군 해양수산과의 박창환 주무관은 “참조기는 산란기에 서식지를 옮기는 습성이 있고,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어종이며, 생김새는 아래턱이 위턱보다 좀 더 길고 몸이 옆으로 납작하며 긴 것이 특징이다. 몸과 등은 암회색을 띠고, 배 쪽은 희거나 황금색에 가깝다. 꼬리자루는 가늘고 길며 등지느러미 연조부와 뒷지느러미 테두리까지 비늘이 있다. 또 참조기는 비늘이 많아 풍요를 상장하는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참조기 15㎝ 이하의 개체는 잡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서식지는 40~200m의 바닥이 모래나 펄로 돼 있는 연안이다. 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겨울을 나고 산란기인 봄에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을 낳는 회유성 어종이다. 먹이는 주로 새우류, 동물성 플랑크톤, 작은 어류 등이다”라고 조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30년 넘게 영광굴비만을 판매한다는 서춘화 씨는 “영광굴비 매장은 400여 곳으로 영광굴비는 곡우 무렵 칠산어장에서 잡힌 참조기를 영광 백수염전의 질 좋은 소금에 절여 서해안 해풍을 만난 것이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
영광에서 영광굴비를 먹으면 힘이 나고 건강해지니 그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까? 따뜻한 봄날에 곡우사리 영광 참굴비를 먹으면서 자린고비를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