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농림축산식품부에 사무관으로 임용되어 22년을 근무해왔다. 그간 농업, 농촌, 식품 분야를 두루 거쳤지만, 특히 식량 산업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식량산업과장, 식량정책과장을 거쳐 식량정책관으로 임명되어 쌀 수급 균형 달성과 농가소득 안정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 중에서도 2013년 이후 지속된 풍년과 쌀 소비 감소로 인해 2016년에는 쌀값이 30년 전 수준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었는데, 2017년에 시장 상황을 감안한 과감한 쌀 수급안정방안을 추진하여 쌀값을 안정화했던 때가 힘들었지만 보람된 순간으로 기억한다. 이때의 수급 균형과 쌀값 안정을 바탕으로 2020년에는 그간 쌀 생산을 유발하던 변동직불제를 폐지하고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 향상과 농가소득 안정을 위한 공익직불제가 도입될 수 있었다.
식량 산업과 현장에 대한 감정이 남달리 애틋한 만큼,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보면 안타까운 심정이다. 쌀 산업이 자율적 수급조절 기능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간 정부와 농업계가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이러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까 우려스럽다.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쌀이 남거나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남는 쌀을 매입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에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할 경우 재정지원을 하는 것이다. 개정안 중 쌀 재배면적 감축을 위한 정책의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남는 쌀을 의무적으로 정부가 매입하는 부분이다.
쌀 시장격리 의무화는 쌀 농가에게 안정적인 판로를 보장를 보장하기 때문에, 쌀 소비 감소에도 불구하고 쌀 생산을 유지하거나 늘릴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지금도 평년 수준의 작황이면 20만톤의 쌀이 초과로 공급되는데, 쌀의 공급과잉이 심화되고 오히려 쌀값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면 2030년에는 쌀 초과생산량이 63만톤 수준으로 늘고,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쌀값은 오히려 하락하여 최근 5개년 평균 쌀값보다 10.5% 낮은 17만원 초반/80kg 수준에서 정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격리에 드는 비용도 연평균 1조원 이상으로 재정부담이 심화되어 청년농업인, 스마트팜과 같이 미래 농업 발전을 위한 예산을 잠식한다.
쌀 생산이 증가하면 식량안보에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량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국민이 먹고도 남을 만큼 생산되는 쌀이 아니라 국민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은 밀, 콩 등의 생산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양곡관리법이 개정되면 쌀 생산이 유지되고, 밀과 콩으로 재배 전환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식량안보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을 병행하더라도 이는 쌀 증산 정책인 시장격리 의무화와 모순되는 정책이기 때문에 재정이 이중으로 들어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정책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양곡관리법은 쌀값 안정을 바라는 농업인에게도, 미래 발전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농업에도, 식량안보 제고를 원하는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농식품부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농업의 미래성장산업화, 식량안보와 농가경영안정체계 구축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미래 농정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직개편을 추진하였다. 특히, 가루쌀 산업 육성과 전략작물직불 추진을 통한 자급률 제고 등 식량안보의 질적 향상을 위해 가루쌀산업육성반을 새로 설치하였다.
정부는 앞으로 쌀 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식량안보 강화를 위해서 쌀은 적정한 규모로 생산하고, 타작물 재배는 늘려나갈 계획이다. 가루쌀산업육성반을 신규로 설치한 것도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가루쌀은 논에서 쌀처럼 재배하지만 밀의 특성을 가져 수입밀을 대체할 수 있는 품종으로, 올해부터 재배를 본격적으로 확대하고 식품기업과 연계하여 빵, 면, 과자, 맥주 등 다양한 가공제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농가에서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 있도록 종자 공급부터 재배 관리를 위한 컨설팅, 공공비축을 통한 안정적 판로를 지원하고, 식품기업에서 가루쌀을 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분 원료와 가루쌀 특성 정보 등을 제공한다.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소비자 평가와 홍보까지 전 단계를 지원하여 가루쌀 산업 생태계를 조성해나갈 계획이다.
가루쌀 뿐만 아니라, 밀·콩과 같이 식량안보에 중요한 식량작물에 대해서는 올해부터 전략작물직불금을 도입하여 생산을 확대한다. 전략작물직불금은 밥쌀용 벼를 재배하던 논에 일반벼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을 심을 경우 작물에 따라 50~430만원/ha까지 지원하는 제도이다. 동계에 밀, 조사료를 심고 하계에 콩, 가루쌀을 심는 등 다양한 작부체계로 전환을 지원하여 논 활용도는 높이면서 쌀 수급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쌀에 편중된 생산구조를 다각화하여 국내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한편, 위기 시에도 우리 국민들이 먹을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농식품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기후변화나 전쟁 등에 따른 공급망 차질로 국제곡물 공급 측면의 불안요인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농식품부는 해외에서도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민간기업이 확보한 해외 곡물 유통망을 확대하는 등 유사시에도 식량안보에 문제가 없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쌀은 우리의 주식이자 생명산업이고, 농가의 51.6%가 종사하고 있는 만큼 농가소득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정부는 우리 쌀 산업이 고품질화 등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단계 도약하고, 농가의 소득안전망은 직불금 확대 등을 통해 더욱 촘촘히 보장해나갈 계획이다. 농업계에서도 쌀 산업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적정 생산에 동참해주시길 당부드리며, 우리 국민들도 식량 산업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